Chapter 9
9. 그래서 어떤 저출산·고령화 정책이 필요한가
저출산·고령화 정책은 출산율과 노동력 확보를 넘어 삶의 질, 가치, 미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사회정책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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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저출산·고령화 정책은 오랫동안 하나의 급한 질문에 붙잡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출산율을 올릴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이해할 만하다. 합계출산율 0명대라는 숫자는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고령화율과 노년부양비의 상승은 재정과 노동시장에 실제 압력을 만든다. 그러나 이 책의 자료를 따라오면 조금 다른 결론에 이른다. 저출산은 출산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구조가 미래를 감당하기 어렵게 된 결과다.
마지막 장의 질문은 그래서 조금 달라진다. 국가는 몇 명을 더 낳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청년이 어떤 사회라면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고령화 정책도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는 방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오래 사는 시민이 어떤 삶의 질과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저출산·고령화 정책의 중심은 인구 숫자가 아니라 삶의 가능성이다.
이 장의 제언은 다섯 축으로 압축된다. 청년에게는 완전히 예측 가능한 미래를 약속하기보다 회복력과 재도전 가능성을 보장해야 한다. 가족정책은 출산 여부와 무관하게 삶이 존중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돌봄정책은 어린이집 중심 공급을 넘어 지역사회 공동 돌봄망으로 넓어져야 한다. 고령화 정책은 더 오래 일하게 하는 정책이 아니라 일할 권리와 멈출 권리의 균형을 다루어야 한다. 지역정책은 출생아 수만이 아니라 정주와 생활을 함께 보아야 한다. 이 다섯 축을 관통하는 기준은 하나다. 사람을 인구 목표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각자가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생활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청년: 예측 가능성보다 회복력과 재도전 가능성
저출산 정책의 핵심 대상은 출생아가 아니라 출산 이전의 청년기다. 이 책에서 반복해서 확인한 것처럼 출산은 혼인 이후에 갑자기 결정되지 않는다. 청년의 고용 진입, 소득 형성, 주거 마련, 가족 형성의 가능성이 이미 출산의 시간표를 만든다. 첫째아 출산연령이 높아진다는 것은 단지 개인이 늦게 낳기로 마음먹었다는 뜻이 아니다. 안정된 삶의 조건이 늦게 도착한다는 사회적 신호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단기 이벤트가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경로다. 첫 직장을 얻고, 소득을 쌓고, 집을 구하고,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독립된 삶을 꾸릴 수 있으며, 아이를 낳는다면 돌봄과 노동을 병행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미래가 불확실하면 사람은 큰 결정을 미룬다. 결혼도, 출산도, 지역 정착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정부가 청년에게 완전히 예측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 줄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불확실성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다. 산업은 빠르게 바뀌고, 기술은 직업의 내용을 바꾸며, 주거와 지역, 가족의 형태도 과거처럼 안정된 궤도를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정책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위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의 실패가 삶 전체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바닥을 만들고,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제도적 여지를 넓히는 것이다.
따라서 청년정책은 안정만을 약속해서는 안 된다. 안정과 함께 회복력(resilience)을 길러 주어야 한다. 회복력은 개인에게 “각자 알아서 버티라”는 말이 아니다. 실업을 경험해도 재교육을 받을 수 있고, 이직을 해도 사회보험과 경력이 끊기지 않으며, 지역을 옮겨도 주거와 돌봄과 건강서비스에서 완전히 고립되지 않는 사회적 능력이다. 청년도 불확실성이 사라지기를 기다리기보다,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배우고 이동하고 다시 설계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춘 사회인으로 성장해야 한다. 좋은 정책은 바로 그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발판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청년정책과 저출산정책은 분리될 수 없다. 청년 일자리, 임금, 주거, 부채, 정신건강, 지역 이동, 교육경쟁 완화는 모두 출산정책의 바깥이 아니라 중심부다. 청년을 “앞으로 아이를 낳을 사람”으로만 보지 말고, 지금 삶을 살아가는 시민으로 보아야 한다. 삶이 존중받을 때 미래도 선택된다.
정책의 언어도 달라져야 한다. “저출산 위기 극복”이라는 표현은 국가의 불안을 앞세운다. 청년에게 필요한 언어는 “당신의 삶이 실패하지 않도록 사회가 함께 부담하겠다”는 약속에 더 가깝다. 정책이 사람을 설득하려면 공포가 아니라 신뢰를 주어야 한다.
가족: 출산 여부와 무관하게 삶이 존중되는 사회
첫 번째 전환은 출산율 중심에서 생활조건 중심으로의 전환이다. 출산율은 정책의 목표라기보다 결과 지표에 가깝다. 혼인, 주거, 고용, 돌봄, 교육, 지역 생활권, 성평등한 시간 배분이 바뀌지 않으면 출산율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출산율을 목표로 삼는 순간 정책은 종종 단기 현금지원이나 출생 건수 경쟁으로 좁아진다.
그러나 아이를 낳는 사람은 통계표 속 출산율을 보고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살 집을 구할 수 있는지, 일자리를 잃지 않을지, 아이를 맡길 곳이 있는지, 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는지, 배우자와 돌봄을 나눌 수 있는지, 아플 때 쉴 수 있는지, 노부모 돌봄까지 동시에 떠안게 되지는 않을지를 생각한다. 출산 결정은 한 해의 사건이 아니라 장기 생활계획이다.
따라서 저출산 정책은 “아이를 낳으면 얼마를 줄 것인가”에서 “아이를 낳아도 삶이 무너지지 않는가”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부모급여와 아동수당 같은 현금지원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현금은 시작 비용을 덜어 줄 수 있지만, 불안정한 노동, 높은 주거비, 닫힌 돌봄 시간, 과도한 교육경쟁이 그대로라면 미래의 위험은 줄어들지 않는다.
두 번째 전환은 노동력 확보 중심에서 삶의 질 중심으로의 전환이다. 저출산을 노동력 부족의 문제로만 보면 아이는 미래의 노동자로, 여성은 출산의 담당자로, 청년은 국가 지속성을 위한 자원으로만 보이기 쉽다. 이런 접근은 정책의 정당성을 약하게 만든다. 출산은 국가의 필요가 아니라 개인과 가족의 삶 속에서 선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할 일은 출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출산을 포기하게 만드는 구조적 위험을 줄이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아도 존중받고, 결혼해도 경력이 끊기지 않고, 아이를 낳아도 빈곤과 고립으로 떨어지지 않으며, 아이를 낳지 않아도 시민으로서 동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이런 사회에서야 출산은 더 자유롭고 덜 두려운 선택이 된다.
주거와 교육은 가족정책의 주변부가 아니라 가족 형성 이전부터 작동하는 장기 위험이다. 집은 단순한 자산이 아니라 함께 살 공간이고, 아이를 키울 생활권이며, 일자리와 돌봄시설과 학교에 접근하는 위치다. 교육 역시 출산 이후의 비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출산 이전의 예상 비용이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난 뒤의 분유값만 계산하지 않는다. 어린이집, 학원, 입시, 대학, 취업까지 이어지는 길을 미리 상상한다. 주거 불안과 교육경쟁이 그대로라면 현금지원은 시작 비용을 덜어 줄 수는 있어도 가족 형성의 장기 위험을 없애지는 못한다.
가족정책은 문화적 환경도 함께 다루어야 한다. 결혼과 출산은 미래를 함께 상상하는 행위인데,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잠재적 위험으로 인식하고 한국 사회에서 살아갈 이유보다 떠나야 할 이유만 더 크게 말해지는 사회에서는 가족 형성의 의지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사회비판은 필요하지만, 비판이 늘 “이 사회에서는 미래가 없다”는 결론으로만 귀결되면 청년은 자신의 생애를 길게 계획하기 어렵다. 필요한 것은 출산을 미화하는 선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성별과 세대가 돌봄과 노동과 생애 위험을 함께 나누는 동료 시민이라는 공적 언어를 회복하는 일이다.
돌봄: 어린이집 중심이 아니라 지역사회 공동 돌봄망
출산 이후의 가장 큰 관문은 돌봄이다. 돌봄을 가족 내부의 사적 책임으로 남겨두면 출산은 곧 경력위험, 소득위험, 시간위험이 된다. 특히 돌봄이 여성에게 집중되는 사회에서는 출산 장려가 쉽게 여성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변질된다. 출산정책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젠더 평등과 돌봄 분담을 핵심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육아휴직과 출산휴가는 제도 문서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누가 실제로 쓸 수 있는지, 어떤 사업장에서 불이익 없이 쓸 수 있는지, 비정규직과 자영업자와 플랫폼 노동자는 제도 밖에 남아 있지 않은지 확인해야 한다. 제도가 안정적 노동자에게 먼저 열리고 불안정 노동자에게 늦게 도달하면, 저출산 정책은 오히려 계층 격차를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돌봄 인프라도 총량보다 생활권과 시간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전국 어린이집 수가 충분해 보여도 부모가 실제 출근 시간에 맞춰 믿고 맡길 수 없다면 사용할 수 없는 돌봄이다. 야간·휴일·긴급돌봄, 초등 방과후 돌봄, 아픈 아이 돌봄, 지역별 보육 접근성은 모두 출산 결정의 현실적 조건이다.
이 점에서 보육정책을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국공립 어린이집은 공공성과 품질 기준을 세우는 데 중요하지만, 부모의 생활시간과 지역별 수요는 훨씬 다양하다. 어떤 부모에게는 집 가까운 어린이집이 필요하고, 어떤 부모에게는 직장 가까운 돌봄이 필요하며, 교대근무자와 자영업자에게는 표준적인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의 보육시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접근성과 다양한 요구를 동시에 충족하려면 국공립, 민간, 직장, 학교, 지역 돌봄기관이 서로 역할을 나누고 연결되어야 한다.
보육의 책임도 어린이집에만 맡겨둘 수 없다. 어린이집은 중요한 거점이지만 아이의 하루는 어린이집 안에서만 구성되지 않는다. 학교, 보건소, 도서관, 주민센터, 지역아동센터, 기업, 협동조합, 종교·비영리 조직, 이웃 공동체가 함께 돌봄의 그물망을 만들어야 한다. 부모가 늦게 퇴근하는 날, 아이가 갑자기 아픈 날, 방학 중 하루의 시간이 비는 날에는 단일 시설 하나가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의 대응 능력이 중요해진다. 돌봄은 특정 기관의 업무가 아니라 사회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야 할 생활 기반이다.
돌봄은 도로와 철도처럼 사회기반시설이다. 도로가 있어야 사람이 이동하고 산업이 움직이듯, 돌봄이 있어야 부모가 일하고 아이가 자라며 가족이 유지된다. 돌봄을 비용으로만 보면 예산 절감의 대상이 되지만, 사회기반시설로 보면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투자다.
고령화: 일할 권리와 멈출 권리의 균형
고령화는 노동시장 밖의 문제가 아니다. 고령층 취업자와 고용률은 증가하고 있고, 많은 사람이 은퇴 이후에도 계속 일한다. 하지만 이 변화를 단순히 활력의 증거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건강하고 숙련된 노동자로 더 오래 일하지만, 누군가는 노후소득이 부족해서 일을 멈출 수 없다.
따라서 고령화 정책은 고용률을 올리는 기술이 아니라 선택권을 넓히는 정책이어야 한다.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나이 차별 없는 일자리와 재교육 기회가 필요하고, 일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충분한 소득보장과 돌봄이 필요하다. 고령층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으면 이 차이를 놓친다.
연금과 고령화 예산도 평균이 아니라 분포를 보아야 한다. 평균 연금수령액이 늘어도 낮은 금액 구간에 많은 사람이 남아 있으면 노후빈곤은 계속된다. 기초연금과 장기요양, 노인일자리 예산은 필요한 안전망이지만, 재정 경직성을 키우기도 한다. 고령화 재정은 세대 간 갈등의 언어로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삶의 최저선을 사회가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의 문제다.
고령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세대 간 대립이 아니라 세대 간 신뢰다. 청년에게는 미래의 부담만 말하고, 고령층에게는 비용만 말하는 사회는 지속될 수 없다. 청년이 노인이 되었을 때도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 고령층이 현재의 안전망을 통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함께 있어야 한다.
지역: 출생이 아니라 정주와 생활을 보아야 한다
지역 출산정책의 평가는 출생아 수에서 멈추면 안 된다. 이 책에서 본 것처럼 출생연도 0세 인구가 네 살까지 지역에 얼마나 남는지를 보면, 출산과 정주는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정주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주민등록상 남아 있는 사람과 실제로 그 지역에서 일하고, 돌보고, 소비하고, 병원에 가고, 학교와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은 완전히 같지 않다. 지역정책은 “누가 주소를 두고 있는가”와 함께 “누가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출산장려금은 출생 순간의 문턱을 낮출 수 있지만, 가족이 지역에 남고 생활할 수 있는 힘은 일자리, 주거, 어린이집, 병원, 학교, 교통, 공동체가 함께 만든다. 생활인구 자료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떤 지역은 주민등록인구는 작아도 낮 시간의 노동·소비 인구가 크고, 어떤 지역은 주소상 인구는 남아 있어도 병원과 상권과 돌봄 이용이 다른 생활권에 의존한다. 행정구역 안의 인구 수와 실제 생활권의 인구 흐름을 함께 보아야 지역정책의 대상이 보인다.
지역정책은 모든 지자체가 같은 방식으로 인구를 늘리겠다는 경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지역은 청년을 끌어들이는 일자리와 대학 기능이 중요하고, 어떤 지역은 고령층 생활권과 돌봄 접근성이 더 중요하다. 어떤 지역은 외국인과 다문화 가족의 정주와 생활 통합을 중심에 놓아야 하고, 어떤 지역은 빈집과 생활서비스 축소를 관리해야 한다. 출생아 수, 주민등록인구, 생활인구, 서비스 접근성을 함께 보아야 지역의 실제 기능을 판단할 수 있다.
인구감소 지역의 목표도 “과거 인구 회복”만이 될 수 없다. 어떤 지역은 작아지더라도 인간다운 생활권을 유지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중요한 목표일 수 있다. 학교, 의료, 돌봄, 교통, 상권을 어떻게 압축하고 연결할 것인지, 주민이 적어져도 존엄한 생활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가 지역정책의 핵심 질문이 되어야 한다. 이때 생활은 단순한 소비 활동이 아니라, 아이를 맡기고, 출근하고, 장을 보고, 병원에 가고, 이웃과 관계를 맺는 일상의 전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지역 저출산 정책은 출산장려금 중심에서 정주권과 생활권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아이가 태어난 뒤 부모가 계속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생활할 수 있는 지역, 외국인이 일하다 떠나는 곳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머물고 지역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지역, 고령층이 병원과 돌봄에서 고립되지 않는 지역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성과 지표다.
정책을 평가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정책 평가는 예산 총액이나 사업 수를 세는 데서 멈추면 안 된다. 예산이 늘었다는 것은 정부가 관심을 가졌다는 신호일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 삶의 조건을 바꾸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저출산·고령화 정책은 총액보다 경로를 보아야 한다. 누구에게 도달했는가, 어떤 선택지를 바꾸었는가, 어떤 계층은 여전히 제도 밖에 남았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성과지표도 다시 설계해야 한다. 출산율 하나로 정책을 평가하면 정책은 단기 반등에 매달린다. 대신 혼인과 주거 안정, 첫째아 출산연령, 둘째 이상 출산 가능성, 육아휴직 사용 가능성, 돌봄 접근성, 0세→4세 코호트 잔존율, 청년 고용 안정, 고령층 소득 충분성, 지역 생활권 유지 같은 중간 지표를 함께 보아야 한다.
데이터는 정책의 온도를 낮추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막연한 불안을 구체적인 책임으로 바꾸는 장치다. 어느 지역에서 아이가 남지 않는지, 어느 노동자는 육아휴직을 쓰지 못하는지, 어느 고령층은 연금을 받아도 충분하지 않은지 알게 되면 정책의 언어는 더 정직해진다.
동시에 데이터는 겸손해야 한다. 출산과 돌봄, 노후의 삶은 숫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숫자 없이 정책을 말하면 책임이 흐려진다. 필요한 것은 사람의 삶을 존중하는 해석과, 그 해석을 점검할 수 있는 자료가 함께 가는 방식이다.
마지막 제언: 대한민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은 일부러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대한민국은 정말 사라지는가. 이 책의 답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대한민국은 이미 사라지고 있다. 아이가 자연스럽게 늘고, 학교가 지역마다 유지되고, 청년이 취업과 결혼과 주거를 일정한 순서로 통과하며, 가족 안에서 돌봄이 해결되고, 은퇴 이후의 삶이 길지 않았던 사회는 더 이상 한국의 현실이 아니다. 사라지는 것은 국가 그 자체가 아니라, 과거의 인구구조 위에서 작동하던 생활방식과 제도적 상식이다.
그런데 국가 소멸론을 부추기는 방식은 이 변화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공포는 문제를 크게 보이게 만들지만, 문제의 작동 경로를 선명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나라가 없어진다”는 문장이 반복될수록 정책은 냉정한 진단보다 급한 처방으로 기울기 쉽다. 출산율이라는 숫자만 앞세우면 왜 결혼이 늦어지는지, 왜 둘째·셋째 출산이 줄어드는지, 왜 지역에서 아이가 남지 않는지, 왜 청년이 미래를 길게 계획하지 못하는지는 뒤로 밀린다. 결국 문제 지적은 커지지만 해결책은 추상적으로 남는다.
공포를 조장하는 정책 환경에서는 효과가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단편적 사업에 예산이 쓰이기 쉽다. 현금지원, 캠페인, 일회성 인센티브, 출산 건수 경쟁은 눈에 잘 보이고 설명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사업이 청년의 주거 불안, 노동시장 진입 지연, 돌봄 시간의 불일치, 교육비의 장기 부담, 지역 생활권 약화를 실제로 바꾸었는지는 따로 물어야 한다. 정책은 위기의 크기를 과시하는 데서 정당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삶의 조건을 얼마나 바꾸었는지로 평가받아야 한다.
더 큰 문제는 그 공포의 생태계 안에서 청년이 오히려 희망을 잃어 간다는 점이다. 청년에게 매일 전달되는 메시지가 “이 나라는 사라진다”, “너희 세대는 감당할 수 없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국가가 위험하다”에 머문다면, 그것은 미래를 선택하라는 설득이 아니라 미래가 없다는 확인처럼 들릴 수 있다. 저출산 정책이 청년에게 죄책감과 불안을 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그 정책은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약화시키는 셈이다.
따라서 결론은 국가 소멸의 공포가 아니라 사회 재설계의 과제로 이동해야 한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출산율을 단기간에 끌어올릴 것인가”만이 아니다. 어떤 노동시장이라면 청년이 다시 시도할 수 있는가, 어떤 주거와 돌봄이라면 가족 형성이 두렵지 않은가, 어떤 교육체계라면 아이 하나를 키우는 일이 장기 위험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어떤 지역이라면 주소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 일하고, 돌보고, 배우고, 소비하고, 치료받는 생활이 가능한가, 어떤 고령사회라면 오래 일할 권리와 멈출 권리가 함께 보장되는가를 물어야 한다.
희망을 정책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저출산 정책의 가장 깊은 목표는 출산율을 몇 퍼센트 올리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청년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있다.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아이를 낳든 낳지 않든, 자신이 선택한 삶이 존중받고 실패로 몰리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청년에게 필요한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다. 안정된 일자리, 감당 가능한 주거, 신뢰할 수 있는 돌봄, 과도하지 않은 교육경쟁, 불이익 없는 육아휴직, 지역에서 정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생활권처럼 구체적인 제도에서 생겨나는 희망이다. 희망은 감정이지만, 그 감정은 제도 위에서 자란다.
고령층에게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다.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기회와 일을 멈출 수 있는 권리, 충분한 소득과 돌봄, 지역사회 안에서 고립되지 않는 생활이 보장되어야 한다. 고령화는 사회의 부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더 긴 생애를 어떻게 가치 있게 살 것인가를 묻는 기회이기도 하다.
결국 저출산·고령화 정책은 인구를 관리하는 정책이 아니라 삶을 조직하는 정책이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을 숫자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를 낳으라고 요구하기 전에 아이를 낳아도 괜찮은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오래 일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오래 살아도 존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 책의 결론은 조용하지만 분명하다. 한국의 인구문제는 출산율만의 문제가 아니며, 노동력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신뢰의 문제다. 정책이 그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면 출산율이라는 숫자는 언젠가 뒤따라 움직일 수 있다. 설령 숫자가 기대만큼 빨리 움직이지 않더라도, 그런 사회는 지금보다 더 살 만한 사회일 것이다. 다만 어떤 대한민국으로 바뀔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저출산·고령화 정책이 끝내 지향해야 할 곳도 바로 그 선택의 지점이다. 대한민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대한민국은 이미 사라지고 있다.